언젠가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있는 날이 오겠지? 오지 않는다면 죽고 싶을테니까 올거라고 믿어야 해…
라고, 미열로 뜨끈해진 볼과 이마에 강바람을 쬐며 생각했다.

컨디션 때문에 약속을 취소하고 싶었지만 목요일부터 서울에 없을 선생님을 못 만나면 너무 후회할 것 같아서 부천으로 갔다.
오늘도 내가 밥 사기는 실패했고 대신 식후 커피를 샀다. 연달아 세군데가 문이 닫혀 있어 보이는대로 들어간 카페는 커피 가격이 너무 저렴했다. 커피 두 잔 드실래요? 물어봤는데 결국 한 잔만 샀다.
강가를 걸을 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에게 무슨 말이든 쏟아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막상 만나니 신중하게 말을 고르고 골라 꺼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5년 전까지만 해도 선생님은 부모님을 제외하고(어쩌면 부모님을 포함하고도) 가장 존경하는 어른이었는데, 지금은 그보다는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사람 정도로 객관화 할 수 있게 됐다. 이마저도 2014년 말에 선생님이 내게 써준 편지에 있던 얘기인데.. 오늘 있었던(쓸데없이 꽁해 있다가 별거 아닌 걸로 꽁 해제한) 일을 생각해보면 나는 여전히 어리고, 선생님은 어른이긴 어른인가보다.
그래도 여전히 선생님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점은 한결 같고 군더더기 없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막연한 동경과 환상은 진작 깨졌지만, 그래도 저 무던함(?)은 여전히 멋있다고 생각한다.
쓰고 싶었던 말들이 있었는데 집 오는 길에 다 흩어져 기억이 안 난다.

올 여름에 동해 가서 초딩 세인이랑 놀아야지. 세인이가 모르는 이모랑 놀기 싫다고 하면 그냥 동해 바다 보고 와야지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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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딱 3년 후 까지만 미리 생각하기로 했다. 그것보다 더 이후는 굳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나의 10년 뒤를 생각할 수 없다. 하지도 않는다. 딱 3년 뒤까지만 미리 생각한다. 그 정도만 고민한다. 어차피 인생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너무 먼 미래를 일찍 생각해두면 나중에 허무할 것 같다.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5년 후, 10년 후, 20년 후를 계획했지만 계획대로 된 건 단 하나도 없다. 사실 3년도 너무 멀다. 그래도 상상해보자. 3년 뒤면 나는 유럽여행을 다녀와 책을 읽다가 복학한 5학년 대학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이후는 나도 모른다. 딱 여기까지다. 뭘 하든 공사가 다망한 젊은이이기 때문에 괜찮다, 라고 맘 먹고 하고 싶은대로 산다. 엄마가 그거 좋다며 응원해줬다. (18. 1. 19.)
심지어 이것도 틀렸다. 2021년 1월 19일엔 5학년 대학생이 아니라 대학원 준비 중인 수료생이 되어 있을 것이다. (19. 2. 5.)
또 틀렸다. 2021년 1월 19일엔 노동조합 상근자 10개월차가 되어 있다. 대학은 아직 졸업 못했다... 진짜 인생은 내 맘대로는 커녕 예측도 안되는구만~ (20.10.4.)
2021년 1월 19일엔 엘지트윈타워 로비 농성장에 있었다. 이제 딱 10개월차 됐다. 여전히 어리버리 활동가.. 언제 2021년이 됐는지도 모르겠는데 벌써 2달이 지났다니 말도 안된다. (21. 2. 12.)
2022년 1월 19일엔… 뭔가 일정이 있었겠지. 나는 22년 4월로 서울지부 상근 2년차가 됐다. 여전히 충분히 내 몫을 못하고 있어 조급하다. 갈 길이 멀다. 3년 뒤를 다시 상상해보기로 했다. 2025년 5월이라.. 4년 전만 해도 3년 후가 멀어보이지 않았는데, 왜 지금은 이렇게도 멀어보이는지, 3년 뒤에 확실한 것은 내가 28살이 된다는 것이다. ㅋㅋㅋ 음.. 그리고 가능하면 서울지부 상근 5년차였으면 좋겠다. 그때는 좀 더 게으르지 않고 성실한 활동가였으면 좋겠다. 안식휴가로 유럽도 다녀온 뒤면 정말 좋겠다! (22. 5. 6.)
이제는 3년 뒤가 좀 더 선명하다. 나는 3년 뒤에도 노동조합 활동가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 20대이다. (23.10.10.)
2년 전의 내가 기대했던 것처럼 나는 4년차가 되자마자 안식휴가로 엄마아빠언니랑 유럽에 다녀왔고 어느덧 2024년도 두달 반밖에 남지 않았다… 잘 하고 있는 건지 조금은 성장한 건지 여전히 잘 모르겠는 스물여섯살이 저물어간다. (2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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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19)

천 년 만 년 좋아하는 사람들과 영화만 찍고 싶었다던 찬실은 협업하던 감독의 죽음으로 일이 뚝 끊기고, 후배네 가사도우미를 하게 됐다. 영화 프로듀서라는 직업이 주인집 할머니가 말하듯 ‘얼마나 이상하면 자기가 뭐하고 다니는지도 모르는’ 일이라지만, 이렇게 갑자기 실업자가 되는 직업인가? 아무튼 찬실 앞에 놓인 삶은 망망대해 같다. 내 자리가 대체 어디인지, 내 자리가 있기나 한지, 그리로 갈 수 있는지 아무리 허우적대도 떠내려가고만 있다고 느낀다. 내가 그동안 해왔던 것은 대체 뭔지, 내가 뭔가 하기는 했던 건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찬실이 붙들 수 있는, 찬실을 붙들어 주는 것이 있다. 사람이기도 하고, 꿈이기도 하고, 취향이기도 한 “믿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찬실에게는 찬실의 시나리오를 지루해서 못 읽겠어도 찬실을 흔들어 깨워주는 소피, 비록 취향은 정반대고 사랑이 아니지만 찬실과 친구가 된 영, 우르르 몰려다니며 찬실을 보필하는 후배들이 있다. 처음에는 으스스했지만 곁을 내주며 찬실을 왈칵 울리는 주인집 할머니가 있다. 힘들 때 보고 싶은 영화가 있고, 다 내려놓고 싶다가도 마음을 고쳐먹게 하는 영화가 있다. 찬실은 스트레스를 풀고 싶을 때 청소를 하고 깊이 생각할 거리가 있을 때 공원을 거닌다. 할머니의 숙제를 돕고, 함께 콩나물을 다듬고, 짧고 삐뚤빼뚤한 시 한 편에 울음을 터뜨린다.

찰나와도 같은 순간과 사소한 것을 잘 포착하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직장을 잃고 연애에 실패할 때에도, 스스로를 자꾸 의심할 때에도,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이 숨 가쁘게 이어질 때에도, 그 찰나와 사소함을 기억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오히려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마음을 흔든 시구를 외울 수 있다면,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 가사를 하나 알고 있다면, 눈을 감으면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이 풍진 세상”에서 감히 희망을 꿈꿔 볼 수 있지 않을까.

찬실 곁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 찬실은 사람들과 함께 있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것이다.

찬실은 어두운 밤 숲길에서 자신의 앞을 직접 비춘다. 찬실은 계속 영화를 찍을 것이다.

김솔의 <보편적 정신> 읽고 뭐 이런 소설가가 다 있나 골 때려서 찾아 읽었다. 역시나 골 때리게 재밌다. 이렇게 사실과 허구를 장난처럼 섞어 놓고 여러 문헌에서 문장들을 따와 직조하는 소설들은 독자로 하여금 책을 덮고 나서 핸드폰을 켜고 검색엔진에 단어들을 마구 쏟아 내게 한다. 나도 몇 번이나 이게 진짜여 뭐여 하면서 검색해봤다.

김솔이 앞으로도 사실과 허구를 지멋대로 넘나들며 독자 등을 치는 것 같기도 하고 마빡을 때리는 것 같기도 한 소설을 많이 써주면 좋겠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는데 임성순의 <문근영은 위험해> 랑 느낌이 비슷하다. 예전에 읽어서 기억이 잘 안나는데 그것도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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